Daily Life/생각 정리

(독후감)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로 접어듦 2024. 4. 23. 23:06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대충 그린 듯한 섬세한 강아지. 참 귀엽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모두 같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욕망을 추구하는 의지의 흐름에 고통받는 존재가 인간이기에, 다른 누군가와 비교함으로써 개별적인 존재로 나아갈 것이 아닌, 동고(苦, 동고동락할 때 그 '동고'이다.)의 마음가짐을 가지며 해탈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생각해야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문득 든 생각.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고통의 크기는 모두 다를텐데, 우리는 어떻게 동고의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을까?

 

사람들 각자는 모두 고민의 크기가 다르다.

태양의 후예, 눈물의 여왕에 출연한 김지원 배우는 한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귀가 컴플렉스라고 한 적 있다.(이후 해당 발언이 화제가 되면서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컴플렉스는 모두 다르고, 관점도 다양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해당 발언이 담긴 짤(사진)을 보고 본인은 부러운 감정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이 발언을 내가 지금 언급하는 건 부러웠다는 걸 말하려는 것도, 비판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고민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뇌리를 스친 장면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비교하기 위해서, 내 생각을 조금 더 잘 전달해보고 싶어서 언급하는 것임을 유의바란다.)

 

(사진 좌 출처) tvn.cjenm.com, (사진 우 출처) 레알예능스브스, YouTube. 오른쪽 사진은 문득 내 머리에 스쳐간 사진이지만, 배우님이 한동안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예시를 이렇게 들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러워진다.

 

누군가는 얼굴 전체가 컴플렉스 일 수 있다.

이렇게 고민의 크기가 모두 제각각인데 어떻게 모두 같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두가 다르지 않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조금 더 생각해보았을 때, 쇼펜하우어는 그런 걸 말한 게 아닌 것 같다는 걸 깨달았다.

고민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 자체도 개별화하는 것이다. 그런 것 조차 해탈해버리라는 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으니, 우리 모두는 남이 알지 못하는 어떠한 의지의 요동에 따라 추구되는 욕망에 흔들리는 존재들이니, 그러한 공통적인 사실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스스로의 컴플렉스를 싫어하고 남들과 비교하게 되는 그런 욕망이 있음을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닐까.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조금은 당대의 철학자들의 사회적 지위, 삶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든 생각일 수 있다. 어떤 생각이었냐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펼친, "모두가 이러한 고통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는 사실로 삶에 대한 위안을 삼을 수 있다"는 이러한 철학은, 사실상 고민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사고방식과 철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조금 현대적으로 비꼬아서 얘기한다면 그런 식으로 들릴 것이다.

 

마치 비교적 가난한 사람이 비교적 부유한 사람에게, "너는 삶이 참 편하고 대부분의 일들이 순조롭겠다." 하고 불평하면, 비교적 부유한 사람도 본인만의 고민과 어려움이 있으니 그렇게 얘기하지 말라면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토로하나, 사실상 비교적 가난한 사람의 삶에 비추어보았을 때 매우 자그마한 일처럼 보이는.

 

정말 놀리는 것처럼 어이없는 말로 들리지 않겠나, 싶었다.

 

책의 서문에는 쇼펜하우어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하고싶은 공부만을 하며 산 삶을 묘사하며, 여행을 다니며 겪고 본 일들을 통해서 인간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닌, 의지에 의해 이끌리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철학이 불교적인 사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쳤으므로 처음부터 그러한 사고가 있진 않았겠지만... 삶이 근본적으로 힘들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같이 많은 사람들이 사고하기에는 쉽지 않은 철학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 모든 학문의 발전은 조금은 여유가 있는 곳에서 발전한 게 아닌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염세주의 철학을 이야기한 쇼펜하우어가 곤궁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곤궁하다고 해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수 없다. 비록 의지(쇼펜하우어가 말한, 이성의 반대에 놓여져 있는 것)가 이끄는 욕망이 현실적인 문제로 상당히 제지당하겠지만, 곤궁하다고 해서 의지(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굳건한 마음)가 없을 수는 없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우리네 삶은 곤궁하거나 권태롭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고, 그렇게 이분화해둔 것은 본인은 권태로운 쪽에 속하지만 여행을 통해서 곤궁한 사람들을 많이 보고 만났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이분화되어도 사실상 내면적으로는, (염세주의적이긴 하지만) 모두가 인생이라는 큰 고통의 바다를 함께 건너고 있는 작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은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 현재 내 삶이 궁핍하고 어렵다고 해서 무언가를 추구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본 한 남자>

누군가를 도와줄 때 사용할 수 있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없는가?

동고를 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한 개별적인 존재를 조금 더 해탈의 경지로 가까이 유도할 수는 없는가? 결국 철학은 본인 스스로를 구원하는 수단에 불과한가?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지하철에서 교통 및 질서 안내를 하는 어르신께 화를 내고 있는 출근 중인 한 남자는 왜 그러고 있었을까.

본인이 서 있는 위치가 다른 사람들의 이동경로에 방해되어 비켜달라는 말이 공격적으로 들렸나보다.

 

처음 든 생각은, 애꿎은 어르신께 왜 화를 내는걸까, 본인도 그러한 부모님이 계셨을텐데, 하는 생각과 더불어, '음, 이 분은 참 개별적인(본인만 생각하는) 존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뒤따라 했던 것이다.

그 다음 두번째로 든 생각은, '이 사람은 대체 어르신께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라는 생각이었다. 출근길에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은 일이 있었던 걸까, 미안하단 얘기를 듣고싶어서 그랬던 걸까. 그 사람에게 도리어 화를 내고 역정을 낼 게 아니라, 어디서 본 일본의 진상 지하철 빌런처럼 달달한 초콜릿 하나를 건네주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따뜻하게 한번 안아주는게 훨씬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차가운 도시 서울에서 문득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는 그렇게라도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고 싶었던 것일 거다. 그는 외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ps. 문득 그가 외로운 존재였을 거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이가 들었나... 이렇게 감수성이 풍부하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어딘가 모르게 공감이 되었던 것 같다. 서울은 사람은 참 많은데 오히려 더 차가운 도시 같다.)

 

가장 유명한 쇼츠도 어디서 퍼온 것이라, 원본 출처를 못 찾았다. 이 일본 분의 초콜릿에 대한 감사 표현은 일본인들의 (흔한) 공손함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진심에서 나온 감사함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조회수를 위한 조작이었을까..